1950~1980년대 한국 사회는 전쟁이 남긴 폐허를 딛고 세계가 주목하는 ‘한강의 기적’을 일궈냈다. 이러한 눈부신 성과 뒤에는 한국경제의 ‘설계자들’이 있었다.
홍제환 통일연구원 연구위원의 저서 ‘경제 관료의 시대’는 그 주요 설계자 13명을 선정해 그들의 이야기를 담아냈다. 저자는 이들을 통해 당대 한국 경제 상황과 과제 등을 면밀하게 살펴본다.
책은 1~4부로 나뉜다. 1부는 재건으로 한국전쟁 이후 1950년대를 다뤘다. 2부는 도약으로 1960년대 얘기다. 3부는 1970년대 이야기를 담았고, 4부는 1970~1980년대 시기를 풀어냈다. 시기별 주요 경제 이슈와 정책, 실제 펼쳐졌던 경제 정책 등을 소개한다.
다음은 홍 위원과의 서면 인터뷰 전문이다.
간단한 자기소개 부탁한다.
-서울대 경제학부에서 학사, 석사 및 박사학위를 취득했으며, 현재 통일연구원 연구위원으로 근무하면서 북한경제, 남북경협 등을 주로 연구하고 있다. 북한경제 연구자가 왜 한국경제사와 관련된 책을 썼는지 의아해하실 수도 있는데, 원래는 한국경제사를 전공했다.
‘경제 관료의 시대’를 집필하게 된 계기는?
-예전부터 이러한 류의 책이 있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해왔다. 고도성장 과정에서 관료들의 활약이 중요했다고 생각하는데, 이를 종합적으로 소개하는 책을 찾기 어려웠다. 각각의 인물들에 대한 평전이나 회고록 등은 있지만, 이 중 일부는 절판되는 등 접근이 쉽지 않은 상황이다.
그런데 때마침 지난해 서울대에 있는 <한국경제와 K학술확산 연구센터>의 요청으로 <한국의 경제관료>라는 K-MOOC 동영상 강좌를 촬영할 기회가 있었다. 이 강의는 모두 강의 원고를 사전에 작성해서 진행하였는데, 이렇게 작성한 원고를 수정‧보완하여 책으로 내게 되었다.
1950~1980년대 대한민국은 시대마다의 과제(재건, 도약, 전환 등)가 있었다. 각 시대의 대통령과 관료들이 펼쳤던 정책들에 대해 어떻게 평가하는가?
-경제사적 관점에서 보면, 전체적으로 시대적 과제를 잘 파악하여 적절한 정책을 추진해 왔다고 이야기할 수 있다. 우선 1950년대 재건이 추진된 것은 한국전쟁 직후라는 사정상 불가피한 일이었다. 그리고 공산품 수출경쟁력이 확인되자, 1960년대 초반부터 수출주도형 성장 전략을 추진하여 도약을 이루게 되는데, 이 역시 현명한 선택이었다고 이야기할 수 있다.
-그런데 경공업 위주의 수출은 장기간 경쟁력을 유지하기 어렵다. 그런 측면에서 1970년대 초반 중화학공업화를 추진하기 시작한 것도 탁월한 선택이었다. 한국경제는 이를 통해 고도성장을 이루며 질주할 수 있었다. 하지만 20년 가까이 성장 우선주의 정책을 편 결과 1970년대 후반 그 부작용이 대두하고 있었다. 한국 정부는 이때 과감하게 성장 대신 안정에 우선을 둔 정책을 추진하는 쪽으로의 방향 전환을 모색했는데, 이 역시 시대적 과제에 대해 적절히 대응한 것으로 평가할 수 있겠다.
당시의 경제 관료들이 때로는 최고지도자(대통령)의 입장과 부딪히기도 했다. 때로는 싸우기도 때로는 타협도 보는 역사가 전개됐는데 여기에 대해 어떻게 보는 입장인가?
외부에는 그러한 모습이 드러나지 않더라도, 내부적으로는 치열한 논의, 그리고 때로는 결기 있는 행동도 필요하다고 생각한다. 책에서도 종종 언급했지만, 박 대통령 시절에는 그처럼 대통령 앞에서 관료들이 의견을 밝히고 논의한 뒤, 이를 토대로 대통령이 의사결정을 하는 경우가 왕왕 있었던 것 같다. 적어도 경제 부문에 대해서는 경제관료들이 지도자보다 더 많은 지식을 갖추고 있을 가능성이 높은 만큼, 대통령이 바람직한 방향으로 의사결정을 할 수 있도록 관료들이 보다 적극적으로 나설 필요가 있다.
관료들이 펼쳤던 당시 대담했던 경제정책은 필연적으로 누군가의 희생이 따랐고, 심지어는 정권 존립까지 위협을 받을 정도였다. 위원님께서는 어떻게 당시 상황과 비추어 볼 때 평가하는가?
-당시 관료들이 펼쳤던 경제정책은 여러 부작용을 낳기도 했다. 예를 들어, 무리한 외자도입 추진은 차관기업의 부실화로 이어져 8.3 사채동결 조치가 단행되기도 했고, 역금리 정책으로 인한 부담을 은행이 떠안기도 했으며, 장기간에 걸친 성장 우선 정책 추진으로 물가 불안이 야기되기도 했다. 그리고 그 과정에서 특정 계층 혹은 특정 집단이 피해를 보았으나, 당시에는 이러한 피해에 대해 적절한 보상이 이루어지지 못하는 경우도 많았다. 경제발전 과정에서 이처럼 과오 혹은 부작용도 있었음을 균형 있게 이야기할 필요가 있는데, 책에서도 그러한 부분을 충분히 강조하지는 못했던 것 같다.
당시에 펼쳤던 경제정책(사채 동결 조치로 인한 모럴헤저드의 시작 등)이 오늘날 발목을 잡는 경우가 있다. 대표적인 사례에 대해 말씀해주신다면.
-한국경제가 안고 있는 고질적인 문제 중 하나인 관치경제도 당시 펼쳤던 경제정책의 산물로 볼 수 있다. 물가정책을 예로 들어보자. 오늘날에는 경제관료가 장기영 부총리처럼 민간인을 불러다 가격을 낮추라고 호통을 치는 식의 행동은 하지 않을 것이다. 하지만 관이 나서서 민간에 압박을 가하는 방식은 여전히 존재한다. 예를 들어, 최근에도 정부가 업계 관계자들을 모아 간담회를 개최하여 가격 상승 억제 혹은 인하를 요구했다는 소식이 종종 들려오곤 한다. 압박의 방식과 정도만 달라졌을 뿐, 관치라는 본질은 크게 바뀌지 않은 것이다. 관치의 그늘은 한국경제에 그만큼 깊게 드리워져 있다.
이 책 가장 말미에 보면 위원님께서는 당시 경제관료들이 현 사회의 복잡한 문제를 풀어내는 것을 회의적으로 보는 것 같다. 그렇게 생각하는 이유는 무엇인가?
-오늘날 관료들은 당시 관료들에 비해서 보다 양질의 교육을 받았으며, 역량이 부족하지도 않을 것이다. 그럼에도 오늘날 두각을 나타내는 관료가 드문 것은 결국 한국경제가 그만큼 성숙해져서 시스템에 의해 운영되고 있어 개인이 부각되거나 개인 역량에 좌우될 여지가 적어졌기 때문이 아닌가 생각된다. 즉 현안을 풀어내는 탁월한 관료가 잘 등장하지 않는 데에는 개인의 역량이라는 요인보다는 경제 환경의 변화라는 구조적 요인이 더 크게 작용하고 있다고 생각된다. 이러한 상황에서는 장기영, 김학렬, 남덕우, 김재익과 같이 당시의 유능한 경제관료가 살아 돌아온다고 한국경제가 안고 있는 복합적인 문제를 풀어내기는 쉽지 않을 것이다.
오늘날 시스템에 의해 돌아가는 경제 구조의 특성으로 한계가 있긴 하겠지만, 책 내용에 언급된 경제 관료들의 삶에서 우리 사회가 배워야 점은 무엇이라 보는가?
-시대적 소명에 대해 갖고 있던 사명감과 헌신된 자세가 아닐까 싶다. 예를 들어, 김재관 선생은 중화학공업화에 기여하겠다는 일념으로 높은 연봉이 보장된 독일에서의 안락한 삶을 기꺼이 포기하고 연구 여건도 대우도 열악한 모국행을 택했으며, 송인상 선생은 한국은행 부총재였음에도 한국의 국제금융기구 가입을 승인받기 위해 체면과 자존심을 내려놓고 미국 국무성 문턱을 수없이 넘나들며 도움을 요청했는데, 이들에게 한국경제의 발전이라는 시대적 소명에 대한 사명감이 없었다면 결코 그런 선택을 하지 않았을 것이다. 또 김재익 선생은 청와대 경제수석으로 있으면서 인기는 없지만, 누군가는 해야 할 정책들을 추진하며 한국경제를 크게 변모시켜 나갔는데, 이 역시 경제정책 기조 전환이라는 시대적 소명을 인식하고 사명감을 가졌기에 가능했던 일이다.
책에 언급된 13명의 관료들 중 위원님께서 가장 높게 평가하는 분은?
-높게 평가한다기보다 가장 인상에 남는 인물을 꼽는다면 김재관 선생을 들 수 있다. 1928년생인 그는 뮌헨 공대에서 공학 박사학위를 받은 뒤, 데마크라고 하는 유명한 철강회사에서 일하다가 위에서 이야기한 것처럼 높은 연봉이 보장된 독일에서의 안락한 삶을 기꺼이 포기하고 1967년 유치과학자로 한국에 들어왔다. 이후 그는 KIST(한국과학기술연구소)에 근무하면서 중화학공업화의 기틀을 잡는 데에 중요한 역할을 하는 보고서를 썼고, 포항제철소 건립과 관련해 대일 청구권 자금을 사용하기 위해 일본과 협상할 때에는 한국 정부의 계획안을 작성하기도 했다.
이후에도 그는 상공부 중공업차관보로 있으면서 자동차 고유모델 개발을 주장하여, 현대의 포니 개발을 이끌어내기도 했는데, 이때 고유모델 개발에 나선 것은 오늘날 한국이 자동차 산업 강국으로 발돋움하는 계기가 되었다. 이후 한국표준연구소 초대 소장이 되어 국가표준체계 확립에도 기여했던 그는 1980년대 초 대학으로 자리를 옮겨 제자 양성에 힘쓰다 퇴임했고, 2017년 여든아홉을 일기로 세상을 떠났다.
이처럼 김재관은 중화학공업 발전 과정에서 중요한 역할을 했지만 그 업적이 잘 알려져 있지 않다가, 그가 세상을 뜬 뒤 그의 업적을 소개한 책이 출간되면서 뒤늦게 조명을 받았다. 그에 관해 알아가면서 그와 같이 경제발전 과정에서 크게 공헌을 했으나, 업적을 충분히 평가받지 못한 관료도 많이 있을 거 같다는 생각이 들었고, 기회가 된다면 그러한 인물을 조명하는 작업을 해보고 싶다는 생각을 했다.
마지막으로 독자들에게 꼭 하고 싶은 말씀 있다면 부탁한다.
<경제 관료의 시대>는 여러 인물을 소개하고 있어, 각각의 인물의 삶과 업적 중 일부만 다루고 있다. 독자께서 책을 읽고 이 시대와 인물들에 대해 관심이 생겼다면, 각 인물에 대한 평전이나 자서전, 회고록 등을 읽어 보시기를 권하고 싶다. 그 과정에서 고도성장기 한국경제에 대한 이해가 더 풍부해짐을 경험하실 것이다. 이 책에 주어진 소임은 독자들이 그러한 독서의 세계로 나아가도록 안내하는 데에 있는 것이 아닐까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