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논평/칼럼

[김수경 칼럼] 민주당은 왜 이완용을 소환했나

'반일 감정 이용한 민주당, 반한 감정 이용한 자민당과 닮은 꼴'
'이완용의 부활은 손쉬운 프레임'

 

한일 관계 악화로 한국 진보와 일본 보수가 동시 이득

 

  지난해 영화관에 ‘한산’을 보러 갔을 때의 일이다. 거북선의 용머리가 왜군의 배를 박살내는 장면에선 너나 할 거 없이 박수와 탄성이 터져 나왔다. 적어도 그때 만큼은 관객 모두 같은 마음이었다. 영화관을 나서면서 문득, 한일관계의 미래에 과연 해법이 있을까 싶었다. 반일감정은 사라지지 않을 것이다. 반일감정이 사라져야 한다는 이야기도 아니다. 내 마음 하나조차 어쩌지 못하는 게 인간인데, 민족의 집단적 체험 속에 아로새겨진 왜구의 침탈과 일제의 폭압이 어찌 쉬이 잊히겠는가.

 

그런 점에서 윤석열 대통령의 한일관계 복원 의지는, 순전히 정치공학적 측면에서만 보자면 위험하다. 반일감정을 건드릴 게 분명하고 지지율 하락은 불 보듯 뻔하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윤 대통령은 양국 관계의 정상화를 위한 결단을 내렸다. 여권에서는 미래지향적이라고 평가했고 야권에서는 굴욕적이라고 평가했다. 아마도 정확한 평가는 그 중간 어디쯤일 것이다.

 

  흥미로운 것은 윤 대통령이 감수한 위험에 비해 야권의 반응이 매우 ‘안전하다’는 점이다. 민주당 인사들은 삼전도의 굴욕, 명성황후 시해, 을미사변, 관동대지진 조선인 학살, 가쓰라-태프트 밀약 등의 역사적 사건을 소환했고 자존심, 굴욕, 굴종, 치욕, 조공 등의 단어가 논평을 가득 채웠다. 민주당은 급기야 ‘윤석열 정권이 곧 이완용의 부활’이라는 내용의 현수막을 전국에 내걸었다. 이러한 민주당의 대응을 ‘안전하다’고 말한 것은 졸지에 매국노가 되기 싫으면 민주당에 동의할밖에 방도가 없기 때문이다.

 

  외교는 근본적으로 ‘거래’고, 준 것이 있으면 받은 것이 있어야 한다. 그 대차대조표가 꼼꼼하고 타당하게 작성되어야 함은 보수건 진보건 어느 정부에나 요구할 수 있는 문제다. 그러나 민주당은 그런 합리적인 논평보다 ‘윤석열이 나라를 팔아먹었다’는 식의 손쉬운 프레임을 사용했다. 왜일까?

 

반일 감정 이용한 민주당, 반한 감정 이용한 자민당과 닮아

 

반일 감정을 이용한 민주당의 정치는 반한(反韓) 감정을 이용한 일본 자민당의 정치와 묘하게 닮았다. 일본이 과거의 만행을 사과하지 않는 배경에는 극우세력의 지지와 표가 필요한 일본 정치인들의 이해관계가 깔려 있다. 아베 총리는 선거철만 되면 ‘한국 때리기’로 재미를 본 대표적 정치인이다. 2019년 참의원 선거 당시 자민당은 후보들에게 한국에 대한 경제보복 조치를 적극 활용하라는 지침까지 내렸을 정도다.

 

  정확히 같은 시기 더불어민주당의 싱크탱크인 민주연구원은 ‘한일갈등에 관한 여론 동향’ 보고서에서 일본의 수출규제 조치로 인한 한일갈등이 21대 총선에 긍정적 영향을 미칠 것이라고 전망했다. 국익보다 표가 먼저냐는 여론이 빗발쳤다. 민주당은 이듬해 총선 후보들에게 배포한 ‘21대 총선전략 홍보유세 매뉴얼’에서도 미래통합당(국민의 힘 전신)을 친일 세력으로 규정하고 심판을 요청하는 전략을 담았다.

 

  한일관계 악화가 일본의 보수 정권과 한국의 진보 정권을 동시에 이롭게 하는 현상은 참으로 아이러니하다. 권력을 영속하려는 양국의 정치인들이 반한과 반일을 계속해서 땔감으로 이용하는 한 한일관계 개선은 결코 쉽지 않은 문제다. 미중갈등의 고조, 우크라이나 전쟁 등으로 더욱 엄중해지는 국제 정세 속에 외교는 그 어느 때보다 국익(國益)을 최우선적으로 고려해야 하지만, 언젠가부터 외교는 철저히 당익(黨益)의 관점에서 소비되고 있다.

 

그러고 보면 노무현 대통령의 이라크 파병과 한미 FTA 체결은 실로 대단한 용단이었다. 노무현 대통령은 2002년 ‘미군장갑차 여중생 압사 사건’이 전국을 반미(反美) 구호로 물들이던 시기에 “반미면 좀 어떠냐”는 정치적 슬로건을 내세워 대통령에 당선됐다. 그런 그가 미국을 도와 이라크 전쟁에 한국군을 파병하고 미국과 FTA를 체결한다는 건 지지자들에게는 일종의 배신으로 느껴졌을 것이다.

 

  실제로 이라크 파병 직후 노 대통령의 지지율은 취임 후 처음으로 30%선이 붕괴됐고 한미 FTA 반대 시위가 한창이던 시절엔 10%대까지도 추락했다. 그의 용단이 새삼 대단하다고 느껴지는 건 단지 정치공학적으로 불리한 선택을 국익을 위해 결단했기 때문만은 아니다. 노 대통령은 ‘진보=친북(親北), 보수=친일(親日)’라고 쉽게 치부해버리는 한국사회의 구태의연한 이념적 도식을 끊어냈다.

 

  우리가 미래 세대에게 조금이라도 이념적 갈등에서 자유로운 나라를 물려주고 싶다면 정치인들에게 바로 이러한 노력이 필요하다. 진보 정부가 남북관계에 힘쓰면 친북 프레임에 갇히고 보수 정부가 한일관계에 힘쓰면 친일 프레임에 갇힌다. 무엇이 우리나라에 더 이로운가에 대한 건설적 논쟁은 실종되고 오로지 ‘빨갱이’ 아니면 ‘이완용’만 남는다. 오히려 진보 정부가 한일관계에 힘쓰고 보수 정부가 남북관계에 힘써야 이념적 정쟁의 악순환을 끊을 수 있다.

 

 그런 점에서 문재인 정부는 ‘토착왜구’나 ‘죽창가’를 운운하기보다는 한일관계 개선을 위해 노력하는 편이 미래 세대에게 더 나았을 것이다. 만약 김대중·오부치 선언이 보수 정부에서 일어난 일이었다면 해묵은 친일 논쟁이 또다시 반복됐을 것이다. 그러나 김대중 대통령을 누구도 토착왜구라고 말하지 않는다. 김대중·오부치 선언은 진보 정부가 이끌어냈기에 미래 세대에게 더 할 수 없이 큰 선물이 될 수 있었다.

 

 이완용의 부활은 손쉬운 프레임

 

  하지만 문재인 정부의 반일기조는 결국 미래 세대를 또다시 이념적 도식에 가둬버렸다. 그리고 이재명 대표가 이끄는 현재의 민주당은 ‘윤석열 정권은 이완용의 부활’이라는 손쉬운 프레임으로 미래 세대에 업을 쌓고 있다. 민주당의 이러한 대응에는 오늘날의 국제 정세와 한일관계에 대한 깊은 고민이 느껴지지 않는다. 생각해보자. 한일관계와 같이 어려운 문제가 이완용의 망령을 소환하는 식의 손쉬운 방법으로 해결될 리 없지 않은가.

 

  우리가 미래 세대에게 물려줘야 할 세상은 ‘반일’이 더 이상 정치적 만능패로 사용되지 않는 세상이다. 이는 일본도 마찬가지다. 일본이 우리에게 사과를 하는가 싶다가도 망언이 끊이지 않는 건 이를 끊임없이 이용하는 일본의 정치인들 때문이다. 결국 양국의 정치인들이 용단을 내려야 하는 문제다. 역사를 잊은 민족에게 미래는 없다. 하지만 이완용을 소환하는 것만으로 한일관계의 해법이 될 순 없다는 것 또한 자명하다.

 

<김수경 한신대 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