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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십만명 다 죽여도 이 섬의 공산화 막으라고 미군정이 명령"… 한강 著 <작별하지 않는다>

'4.3 바로보기' 제주4·3사건재정립시민연대 “‘작별하지 않는다’, 남로당 만행을 군경에 뒤집어씌워”
"허구에 감성을 입혀 대한민국과 군경의 명예를 악의적으로 훼손… 남로당 입장에서 쓴 소설"

 

제주 4.3사건 때 남로당이 저지른 반대한민국 행위와 양민 학살 만행을 밝히는 데 앞장서고 있는 시민단체 ‘제주4·3사건재정립시민연대’가 한강 작가의 소설 <작별하지 않는다>의 역사 왜곡을 설명하는 자료를 본지에 보냈다. 4.3사건 당시 벌어진 남로당의 만행을 군경이 저지른 것으로 오도하고, 없던 사실을 있었던 것으로 조작했다는 것이다. 

 

단체는 “한강의 4.3소설은 남로당의 학살과 만행을 전부 군경과 서북청년단에게 뒤집어 씌우고, 초토화 작전이 없었는데 작전이 있었던 것처럼 서술하고, 제주도에서 3만명을 살해했다고 왜곡하고 있다”고 지적했다.

 

또 “4.3 사망자는 약 1만 명인데, 이 중 공산당에 의한 학살이 2000여 명, 진압과정의 억울한 희생은 500명~1000명 정도로 추정된다”며 “나머지 사망자는 교전 중 사살 등 정당한 진압행위에 해당한다”고 설명했다. 

 

이어 “역사적 사실을 소재로 쓴 한강의 소설은 허구에 감성을 입혀 대한민국과 군경의 명예를 악의적으로 훼손하고 있으며, 남로당의 입장에서 쓴 반국가소설에 불과하다”고 평가하며 “역사적 사실에 이해관계가 있는 군경 등의 명예를 훼손할 자유까지 소설가에게 허용되지 않는다”고 비판했다. 

 

다만 단체 측은 한 작가의 노벨상 수상이 오히려 4.3사건을 국민에게 올바로 알리는 계기가 될 수 있을 것이라 기대했다. 전민정 제주4·3사건재정립시민연대 대표는 “노벨상으로 인해 한강의 작품들은 이제 잘 모르고 있던 일반 대중에게도 비평의 대상이 되었다”며 “논쟁이 치열하겠지만 바람직할 결과를 낼 것으로 보인다”고 전망했다. 

 

이하는 제주4·3사건재정립시민연대가 역사 왜곡이라고 지적한 <작별하지 않는다>의 서술 발췌다. 강조체는 본지가 표시한 것이다. 

 

“서청-서북청년단-사름들이 잔인해그네, 내내 같이 댕기던 민보단원들도 수틀리민 죽여분다는 소문이 이시난 나는 걱정되었주게. 파출소 마당에다 산사름 각시를 총검으로 찔렁 눕혀놔그네 민보단 사름들헌티도 다 한 번씩 죽창으로 찌르렌 했다는 이야기도 들어난.”

 

“무장대 백여 명의 은거지를 알아내지 못한 채 초토화작전이 일단락된 1949년 봄, 이만 명가량의 민간인들이 한라산에 가족 단위로 숨어 있었다.” 

 

“당시 서청들의 무법 행위가 상상을 넘어섰다고 엄마는 말했어. 강간과 납치 살인이 흔하게 벌어지니까 적당한 혼처만 있으면 서둘러 처녀들을 결혼시키는 분위기였다고.”

 

“1950년 여름 전쟁이 터지자 명단대로 예비검속되어 총살됐다. 전국에 암매장된 숫자를 이십만에서 삼십만 명까지 추정한다고 했다.”

 

“약 삼천오백 명이 이곳에서 총살됐어 대구형무소 재소자, 대구 보도연맹 가입자, 경산경찰서 인근 창고에 수용됐던 경북 지역 가입자까지..”

 

“여러 날에 걸쳐 군용 트럭이 광산으로 들어갔어. 새벽부터 밤까지 총소리가 들렸다는 주민들의 증언이 있어. 갱도가 시체로 가득찬 다음엔 근처 골짜기로 장소를 옮겨서 총살하고 매장했어.”

 

“그 겨울 삼만 명의 사람들이 이 섬에서 살해되고, 이듬해 여름 육지에서 이십만 명이 살해된 건 우연의 연속이 아니야. 이 섬에 사는 삼십만 명을 다 죽여서라도 공산화를 막으라는 미군정의 명령이 있었고, 그걸 실현할 의지와 원한이 장전된 이북출신 극우 청년단원들이 이 주간의 훈련을 마친 뒤 경찰복과 군복을 입고 섬으로 들어왔고, 해안이 봉쇄되었고, 언론이 통제되었고, 갓난아기의 머리에 총을 겨누는 광기가 허락되었고 오히려 포상되었고, 그렇게 죽은 열 살 미만 아이들이 천오백 명이었고, 그 전례에 피가 마르기 전에 전쟁이 터졌고, 이 섬에서 했던 그대로 모든 도시와 마을에서 추려낸 이십만 명이 트럭으로 운반되었고, 수용되고 총살돼 암매장되었고, 누구도 유해를 수습하는 게 허락되지 않았어.”

 

송원근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