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미 테리 기소 사건’이 국내 언론을 통해 보도되자, 비밀 요원의 활동이 허술하다는 이유로 국가정보원이 국민적 조롱거리로 전락했다. 국정원 요원의 활동이 CCTV에 모조리 노출되는가 하면, 수미 테리에게 줄 명품백을 구입한 내역이 미국 정보당국에 포착되는 등 '비밀 유지가 생명'일 것이란 국민의 상식과는 맞지 않아서다. 그런데 노무현 정부에서 국정원 제1차장을 지낸 염돈재 전 성균관대 국가전략대학원장은 “우방국에서 비밀 접촉은 오히려 경계 대상이 될 수도 있다”면서 “선물 구입 흔적을 남긴 것도 일부 비판의 소지는 있지만 회계규정을 따라야 하는 일선 정보관 신분으로서는 이해할 수 있는 측면”이라고 다소 다른 시각을 내놨다.
미 연방 검찰 공소장에는 지난 2020년 8월 수미 테리 미국외교협회(CFR) 선임연구원이 미국 뉴욕 맨해튼의 레스토랑에서 국정원 관계자 2명과 저녁 식사를 하고 있는 사진과 지난 2021년 4월 16일 미국 워싱턴DC의 한 매장에서 국정원 요원이 테리 연구원에게 명품 핸드백을 사주기 위해 결재하고 있는 사진 등 4장이 담겨 있다.
염 전 원장은 최근 ‘월간 헌정’(대한민국헌정회 발간, 9월호)에 <국정원 정보활동의 현실과 과제>란 제목의 글을 기고했다. 그는 이 글에서, 국정원 요원들이 폐쇄회로(CC)TV에 포착된 사실에 대해 "수미 테리와 비밀접촉할 필요는 없었다"며 "외교관 신분인 국정원 직원이 북한 전문가와 의견을 나누는 것은 외교관계에 관한 비엔나협약에 보장된 일상적 정보활동이자 한미 양국에 도움이 되는 일이기 때문"이라고 설명했다. 또 “게다가 선진국에서는 비밀접촉이란 사실상 불가능하다”고 설명했다.
이 같은 설명은 국내 언론과 정치권에서 국정원에 가한 비판이 국민의 통념 수준을 벗어나지 못한 것이었다는 취지로 읽힌다. 염 전 원장은 "우방국에서 통상적인 외교 활동을 하면서 비밀접촉 방법을 사용한다면 오히려 부자연스러운 일로 여겨져 주목 대상이 되기 쉽다"고도 지적했다.
염 전 원장은 국정원 요원이 명품 가방을 구입하면서 자신의 신용카드를 사용한 것에 대해선 “정보활동 기록을 남겼다는 점에서 비판받아 마땅하다”면서도 “엄격한 회계규정을 지켜야 하는 일선 정보관의 입장은 다를 수 있다”고 지적했다. 그는 “국정원법에는 국가안전보장을 위해 기밀이 요구되는 경우를 제외하고는 모든 예산 집행 시 증빙서류를 첨부하도록 되어 있고, 국정원의 내부감사는 매우 엄격하다”며 "수미 테리가 선호하는 물품을 고르게 하고 손쉽게 증빙서도 구 비하기 위해 그렇게 했을 것이다. 바쁜 업무에 선물 하나를 위해 복잡한 절차를 거치는 것이 번거롭기 때문"이라고 설명했다.
염 전 원장은 이번 사건에 대해 ▲범법 사실이 확인되고 증거가 확실한 경우 기소하는 것이 FBI의 업무방식 ▲미국이 금년 대통령 선거를 앞두고 외국의 정치개입 경계 ▲미국 시민의 혈통 모국을 위한 범죄에 엄격 ▲테리 연구원이 FBI의 경고에도 불구하고 법 위반 활동 지속 등을 사건이 커진 이유로 예상했다.
다만 염 전 원장은 수미 테리가 우리 정보요원과 접촉해 기소까지 당한 것에 대해 “이번 사건은 미국 법 제도에 대한 인식 부족, 허술한 보안 의식, 미국이 우방국이라는 점에서 비롯된 방심”이라며 “▲캠퍼스 모집 확대 ▲국가정보학 시험의 부활 등 요원 모집 방법의 개선 ▲교과목과 교육내용의 재검토 ▲정보활동 및 보고 체계의 개선 ▲회계규정의 재정비 등을 추진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앞서 미국 연방 검찰은 미국 중앙정보국(CIA) 출신 대북 전문가인 테리 연구원을 지난 7월 15일(현지시각) 기소했다. 테리 연구원은 미 정부에 신고하지 않고 한국 정부를 위해 일했다는 의심을 받고 있다. 미국은 외국대리인등록법(FARA)에 따라 외국 정부나 정당, 회사 등의 정책 및 이익을 대변하거나 홍보하는 사람은 법무부에 신고해 활동을 보고하도록 하고 있다.
심민섭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