싸우면 닮는다고 했던가. 조선일보가 이재명 더불어민주당 대표를 많이 비판하더니, 이젠 이 대표 화법을 따라하는 모양이다. 이 대표는 자신이 한 말을 손바닥 뒤집듯 그냥 뒤집어버리는 사람이다. ‘박근혜 존경한다고 했더니 진짜 존경하는 줄 알더라’가 대표적이다. 그런데 이젠 ‘언론사’가, 조선일보가 말을 뒤집고 있다. 자신이 기사로 버젓이 내보낸 걸 가지고 ‘그거 사실은 내 얘기가 아니었어’ 이러고 있다.
미국 대선이 트럼프 후보 압승으로 끝난 다음날인 7일 조선일보는 <또 망신당한 주류 언론… 박빙이라더니, 여론조사 3연속 빗나가> 이런 제목으로 기사를 냈다. 미국 주류 언론이 거의 다 해리스 후보 승리를 예상했는데 결과는 전혀 달랐다고 비판하는 내용이다. 이 기사에 어떤 댓글들이 달렸을까. 기사를 쓴 기자와 데스크는 이 댓글에 뭐라고 답할 텐가.
“조선일보 유체이탈 화법? 대선 1~2일 전까지만 해도 CNN, NBC, 이코노미스트 여론조사 결과 가져와서 대놓고 해리스 밀던 거 기억 안나나.” “제목만 보고 한국 언론을 이야기 하는 줄 알았네. 너나 잘하세요.” “끝도 없이 해리스, 바이든을 칭송하고 트럼프를 모욕주던 참으로 건방진 조선일보.” “남 얘기 하네. 외신기사 베껴쓰기에 급급했던 게 누구냐.” “우리 주류 언론은? 입에 침이나 바르고 얘기하지?”
잘못은 조선일보를 비롯, 본지를 제외한 거의 모든 한국 언론이 저질렀는데 왜 부끄러움은 나의 몫이 되는가. 한국 언론은 줄곧 해리스가 트럼프를 앞서고 있다는 친민주당 미국 언론을 받아쓰는 데 급급했다. 그러다 선거 막판엔 트럼프가 해리스를 ‘맹추격’하고 있다고 보도했다. 민주당 지지자들을 결집시키려는 친민주당 미국 언론에 놀아난 것이다. 이런 오보를 자행해놓고는 아무도 사과하지 않는다.
심지어 조선일보는 6일(한국시각) 오전 11시 트럼프가 선거인단 195명을 확보하고 해리스는 113명에 그친 상황에서도 “막판 초접전이 예상된다”고 기사를 올려놓고 있었다. 이쯤되면 미국 언론을 받아썼다거나 노골적으로 해리스를 미는 수준을 넘어 가히 ‘환자’ 수준이다. 이는 용인할 수 있는 인지부조화 수준을 넘어선 것이다.
미국 주류 언론이 그렇게 쓰다보니 ‘어쩔 수 없이’ 따라썼다는 게 변명이 될까? 그렇지 않다. 국내 전문가들 중엔 줄곧 트럼프가 압도적 승리를 따낼 것이라고 예측한 사람이 많았다. 대표적으로 이춘근 박사와 강미은 숙명여대 교수가 그랬다. 박종훈 전 KBS 기자는 이미 트럼프 재집권을 대비하라는 책까지 냈다.
그럼 이분들은 트럼프 ‘빠’라서 트럼프가 이긴다고 예상했을까. 아니다. 이미 미국 주류사회에도 트럼프가 이길 것이란 데이터가 충분히 있었다. 대표적으로 한국 언론이 ‘TV토론에서 해리스가 이겼다’고 거짓 보도를 해댈 때, 라스무센 여론조사는 ‘트럼프가 해리스보다 2%p 앞선다’고 발표했다. 선거 당일 영국 이코노미스트가 해리스 56%, 트럼프 43%라고 황당한 주장을 했을 때도, 미국에선 리얼클리어폴링, 더힐 등 유명 정치전문 매체와 여론조사 사이트는 트럼프 승리를 점쳤다.
정신이 똑바로 박힌 언론이라면 이런 관측을 모두 종합하고 가감없이 한국 독자들에게 전해야 했다. 그런데 조선일보를 비롯한 거의 모든 한국 언론은 ‘해리스 선거운동원’ 수준의 보도를 서슴지 않았다. 이래놓고 사과 한마디 없다. 한국 언론을 보고 해리스에 투자한 국민들의 손해는 어쩔 텐가. 정부가 이런 언론을 믿고 트럼프 진영을 소홀히 했을까 두렵다. “한국 신문을 봐선 세상 돌아가는 걸 알 수가 없다”는 어떤 식자의 개탄을, 그래도 양심이 한가닥 남아 있다면 새겨 들어야 할 것이다.
트루스가디언 편집장 송원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