트루스가디언은 4.10 총선에서 여당의 참패 원인을 분석하고 앞으로 나아갈 방향을 가늠해보는 특별 릴레이 칼럼을 기획했습니다. 본 칼럼의 내용은 본지의 의견과 다를 수 있음을 말씀드립니다. -편집자주- |
다들 익히 알고 있는 것처럼 제22대 국회의원 선거는 우파진영의 참패로 끝났다. 국민의힘과 더불어민주당의 득표율 차는 5.48%였지만 실제 획득한 지역구 의석은 161석 대 90석으로 71석이나 차이가 났다.
이 결과를 두고 득표율이 의석수에 반영되지 않은 것은 소선거구제의 문제라고 주장하는 사람도 있고, 5.48%의 차이는 다음에 열심히 하면 뒤집을 수 있으니 너무 걱정하지 말자고 자위하는 사람도 있다. 하지만 두 주장 모두 틀렸다.
소선거구제의 문제를 말하는 사람들은 그 반대의 결과, 즉 제19대 국회의원 선거에서 새누리당이 민주통합당에 비해 5.43% 더 득표했음에도 지역구 의석을 21석 더 가져갔던 것이 문제라고 말하지 않는다. 소선거구제는 이미 정해진 규칙이었고 국민의힘은 이 규칙 내에서 얼마나 좋은 성과를 내는가에 실패했을 뿐이다.
그리고 득표율 차가 5.48%에 불과했으니 다음 대통령선거에서는 얼마든지 격차를 극복할 수 있다는 희망을 말하는 사람들은 비례대표 선거 결과를 애써 외면한다. 지역구는 더불어민주당 50.56% 대 국민의힘 45.08%였지만, 비례대표 결과는 달랐다. 범좌파 연합인 더불어민주연합과 조국혁신당이 얻은 표의 합은 50.94%로 지역구에서 얻은 표와 비슷하지만 국민의미래가 얻은 표는 36.67%에 불과해서 지지율 격차는 5.48%가 아닌 14.27%로 현격하게 벌어진다. 개혁신당의 3.61%를 합해도 그 격차는 10%가 넘는다. 이건 쉽게 극복하기 어려운 격차이고, 더불어민주당이 절대다수인 국회의 지형에도 불구하고 대통령제 국가에서 국정의 성과에 대한 부정적 평가는 소수여당이 부담할 수밖에 없다는 사실 때문에 차기 대통령선거는 매우 비관적일 수밖에 없다.
그럼 이런 처참한 결과를 가져오게 된 원인은 어디에서 찾아야 할까? 네 가지 정도의 이유를 들 수 있을 것 같다.
첫 번째 이유는 가치에 대한 인식의 실패라고 할 수 있다. 87체제 아래에서 우리나라 선거는 기존의 민주 대 독재 프레임이 지역대결 구도로 변화했다. 그리고 노무현의 열린우리당 창당, 그리고 손학규의 공개적 좌파 선언 이후 우리나라 선거는 다시 이념대결 구도로 바뀌었고 그 구도가 지금까지 고착화돼 있다. 문제는 이러한 상황을 좌파는 명확히 인식하고 있는데 우파는 여전히 이념대결 구도라는 사실을 받아들이지 못한다는 점이다. 좌파는 20년 동안, 그리고 사실 그 이전부터 차근차근 이념적 기반을 공고히 하고 어떠한 상황에서도 충성심을 포기하지 않는 세력을 만들어왔다. 하지만 현재 우파의 핵심을 이루는 7080 세대들은 민주화 세력에 대한 심리적 죄책감의 수준을 벗어나지 못한다. 그래서 좌파는 좌측으로 뭉치는데 우파는 우측으로 뭉치자는 얘기 대신 자꾸 중도확장이라는 헛소리를 하면서 점점 왼쪽으로 옮겨간다. 그 결과 우리나라의 이념대결은 좌 대 우가 아닌 극좌 대 중도좌파가 되어 버렸다. 그러니 우파가 마음을 둘 곳이 없어진 것이고 그 결과가 선거의 참패로 나타난 것이다.
이러한 상황을 상징적으로 나타내주는 것이 “국민의힘”이라는 사회주의적 정당 명칭이다. 정당의 이름이라는 것은 그 정당이 추구하는 이념적 가치를 알려주는 것이어야 한다. 자유, 민주, 공화, 정의 같은 차가운 단어들이 그렇다. 반면에 평화, 통일, 더불어, 통합 등은 이념적 가치가 아니라 정서적 용어이자 좌파적인 따듯한 단어들이다. 이 기준으로 “국민의힘”이라는 이름은 그야말로 역대 최악의 정당명이라고 해야 할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이름이 문제를 갖고 있다는 사실조차 깨닫지 못한 상태에서 선거에 나갔다는 점이야말로 국민의힘이라는 정당의 현주소를 알려주고 있다.
두 번째 이유는 선거전략의 부재이다. 이번 선거에 임하는 국힘의 기본 전략은 이재명의 사법리스크였다. 설마 국민들이 이재명처럼 도덕적 흠결이 크고, 그를 떠나 엄청난 위법을 저지른 사람을 지지하겠느냐는 것이었다. 이 전략은 두 가지 점에서 실패가 예정된 것이었는데, 우선 앞서 이야기한 것처럼 좌파 지지세력의 무조건적 충성심을 간과했다는 점이 그 하나이고, 다른 하나는 이재명에 대한 공격이 먹혀들어가지 않을 경우에 대한 플랜B가 없었다는 점이다.
플랜B가 없었던 모습에서는 아주 강한 기시감을 느끼게 된다. 우리 정치사에서 플랜B가 없어 망한 대표적 사례는 두 가지가 기억나는데, 첫째는 다스만 믿고 이명박 공격에 나섰던 정동영의 경우이고, 두 번째는 반기문만 믿고 박근혜를 탄핵했던 김무성, 유승민 세력의 경우였다. 정동영은 힘도 못쓰고 역대 대선 사상 가장 커다란 격차로 패배했고, 바른미래당 세력은 반기문이 사퇴하자 문재인의 집권을 손놓고 바라볼 수밖에 없었다.
이번 선거 역시 처음부터 정책선거로 접근했어야 했다. 나라의 미래를 위해 우리가 다수당이 되면 이런 정책을 펼치겠다는 주장을 했어야 하는데 국민의힘에는 그런 전략이 존재하지 않았다. 지난 대선의 여가부 폐지 수준의 정책조차 없었는데 참 이해할 수 없는 장면이었다. 현 대통령은 역대 최소 득표율 차로 당선되었고 국회는 야당이 절대 과반수를 점하고 있는 허약한 정권으로 출발했고 그 상태는 선거 전까지 변하지 않았으며 불행하게도 선거 후에도 바뀌지 않았다. 그렇다면 허약함을 호소하면서 언더독의 자세로 동정을 구했어야 했고, 국회의 다수당인 야당으로부터 얻어맞는 모습을 보였어야 했는데 내 기억으로는 정권이 바뀐 후 그런 모습을 본 일이 없다. 오히려 선거마다 “힘 있는 여당 후보”라는 구호를 내세우고 있었는데 이런 모습은 선거 전체를 통할할 전략적 헤드쿼터가 없었기 때문에 나온 것이다.
그렇게 된 것은 대통령과 비대위원장의 아마추어리즘이라는 세 번째 이유 때문이라고 하지 않을 수 없다. 윤석열 대통령, 한동훈 비대위원장은 모두 정치 경력이 없는 사람들이다. 윤석열 대통령은 우리나라 역대 대통령 중 군사쿠데타와 관련된 박정희, 최규하, 전두환을 제외하고 국회의원 경력이 없이 당선된 최초의 대통령이다. 언론은 집권 초기 윤 대통령이 정치권에 빚을 지지 않았다는 긍정적인 면을 부각해 줬지만 대통령제 국가에서 정치권을 잘 모른다는 것은 긍정적인 면보다는 부정적인 면이 더 강하고 그런 부정적인 면이 이번 총선의 대실패를 가져왔다고 할 수 있다.
대통령이 이번 총선에서 미친 가장 큰 악영향은 선거의 승리를 위해 물러서는 모습을 보이지 않고 강성 일변도로만 나감으로써 부정적 이미지를 형성했다는 점을 들 수 있다. 국회의원 경험이 있는 대통령이었다면 이번 민희진 사태에서 보듯이 연봉 5억원에 인센티브 20억원을 받는 민희진을 두고도 방시혁보다 약자라면서 응원하는 사람들이 많은, 언더도그마에 우호적인 우리나라 국민의 성향을 반드시 감안했을 것인데 대통령은 그런 부분을 너무 가볍게 생각했고 이는 총선의 실패 및 집권의 남은 3년 동안 이재명의 협력을 받아야 한다는 최악의 결과를 가져왔다.
하지만 대통령의 아마추어리즘보다 훨씬 더 문제였던 것은 한동훈의 아마추어리즘이었다. 한동훈의 아마추어리즘은 비대위원장 활동 내내 두드러졌는데 그 가운데서도 가장 대표적인 것을 들자면 비대위원장 참여시기, 비대위 구성, 공천, 선거운동 마지막 날의 일, 네 가지를 들 수 있다. 이 가운데 공천은 네 번째 이유로 말할 예정이기 때문에 나머지만 먼저 이야기해 보기로 한다.
우선 한동훈 역시 국회의원을 해본 경력이 없었기 때문에 작년 12월에 법무부장관직을 사퇴했을 때 나를 포함한 모든 사람들은 한동훈이 이번 선거에 출마할 거라고 생각했었다. 그런데 한동훈은 비대위원장이 되자마자 불출마를 선언했고 사람들은 크게 놀랐다. 나는 이것이 한동훈의 첫 번째 실수라고 생각한다. 비대위원장을 맡고자 했으면 총선에도 출마했어야 했다. 비례대표로 나서는 것은 제도상 불가능하지만 당선이 확실한 지역구를 담당한 후 국회의원 당선 확정자이면서 차기 당대표이자 대선주자의 자격으로 총선을 지휘했어야 했다. 그렇지만 만약 한동훈이 처음부터 총선 불출마를 의도했다면 그렇게 일찍 국민의힘에 합류해서는 안 됐다. 야권은 한동훈을 가장 꺼리고 있었으므로 사퇴시한을 넘길 때까지 법무부장관의 자리에 있으면서 야권의 관심을 한 몸에 집중시킨 후 1월 말쯤 장관직 사퇴와 함께 비대위원장을 맡았다면 본인이 의도한 대로 사욕이 없는 공명성을 강조할 수 있었음은 물론 총선일까지 컨벤션효과를 유지할 수 있었을 것이다. 사퇴 전에 사형집행을 하고 나왔다면 훨씬 더 좋았을 것이고.
다음 실수는 비대위 구성에 있었다. 비대위의 구성은 단순히 일할 사람을 모으는 것이 아니라 국민을 향해 나의 정체성과 지향점을 밝히는 정치행위이다. 그런데 한동훈은 그것이 정치행위라는 사실을 인식하지 못했던 것 같다. 그 결과 나타난 비대위의 구성원은 이후 선거가 끝날 때까지 두고두고 한동훈에게 정치적 부담으로 작용했다. 김형동의 친중 논란, 김경률, 민경우, 한지아의 좌파 성향 논란, 김예지의 친전장연 논란 및 한지아, 김예지의 비례대표 공천 등이 모두 그런 사례이다. 이런 구성원으로 인하여 국민의힘 비대위를 보는 우파 지지자들 중에는 한동훈의 정체성에 대한 의문을 제기하는 사람들까지 존재했을 정도였다.
마지막으로 한동훈은 선거운동 마지막 날 건강상의 이유로 거리인사 일정을 취소했다. 이건 정말 주위 참모들을 욕하지 않을 수 없다. 과거 노태우 대통령 시절 국무총리 지명자였던 정원식은 교수로 재직 중이던 학교에서 마지막 강의를 하다가 대학생들에게 집단구타를 당하고 달걀과 밀가루 세례를 받았다. 그 결과 정원식에 대해 조성된 우호적 여론은 노태우 정권에 커다란 힘으로 작용했다. 또 제4회 지방선거 유세 중이었던 박근혜 당시 한나라당 대표가 커터칼 피습사건에서 깨어나자마자 “대전은요?”하고 물었다는 에피소드를 통해 한나라당은 대전 선거에서 역전승을 거뒀고 박 전 대통령은 선거의 여왕이라는 별칭을 얻었다. 만약 한동훈이 당시 정말로 건강이 나빴다면 선거운동을 하다가 쓰러져 응급실로 실려갔어야 했다. 이재명의 예에서 알 수 있듯이 정치인들은 건강이 나쁘지 않은데도 나쁜 척 가장해 병원에 실려감으로써 동정심을 유도하려고 하는데 실제로 건강이 나빴던 한동훈이 마지막 유세 중 응급실로 실려가고 그 장면이 언론을 도배했다면 수도권 박빙 지역 십수 석은 결과가 달랐을지도 모른다.
이런 것들이 모두 한동훈의 아마추어리즘을 드러내는 사례들이다.
네 번째 이유는 누구나 공감하듯이 공천실패에 있다. 한동훈 비대위는 중진들의 험지출마를 요구했는데 이건 선거를 정말 우습게 보는 태도가 아닐 수 없다. 한국 야구의 전설인 고(故) 최동원 선수가 은퇴 다음 해인 1991년 부산시의원 선거에 출마했지만 고작 37.8%를 얻는 데 그쳐 낙선했다. 최동원이 낙선한 이유는 단 한 가지였다. 정당이 민주당이었다는 것. 비록 33년 전 일이기는 하지만 최동원이 고향인 부산에서 시의원에도 당선되지 못했던 것이 우리나라의 지역감정이자 이념대립 구도의 본질이다. 그런데 국민의힘 비대위와 공관위는 다선의원이라는 이유로 아무 연고도 없는 곳에 가서 열심히 뛰어보라는 요구를 정상적인 정치행위라고 진심으로 믿었는지 의문이 아닐 수 없다.
총선은 앞서 말한 것처럼 정당 차원의 어젠다 설정도 중요하지만 그만큼 중요한 것이 얼마나 지역에 밀착한 후보를 공천하는가이다. 이번에 인천에서 당선된 국민의힘 윤상현 의원, 부산에서 당선된 더불어민주당 전재수 의원 같은 사례가 총선의 모범답안이다. 그런데 국민의힘 공천은 그런 관점의 중요성을 제대로 인식하지 못했다. 그 결과 고양에서 김현아 대신 김용태를 공천하고, 수원에서 홍종기 대신 이수정을 공천해 결국 실패했다. 양천에서 조수진 대신 구자룡을 공천한 것 역시 경선을 거쳤다고는 하지만 같은 맥락이다. 이런 식으로 실패한 지역구는 한참을 더 들 수 있을 것이다.
또 이념의 중요성을 제대로 체감하지 못한 공천 역시 실패의 원인이었다. 더불어민주당에서 이재명으로부터 밀려나 탈당했을 뿐 우파로 전향하지도 않았고, 자신이 당을 옮긴 이유도 제대로 설명하지 못하는 김영주, 이상민을 꽃가마를 태워 입당시키고 공천을 준 후 실패한 모습을 보면 이 당이 아직도 정체성 혼란을 겪고 있다는 생각을 하지 않을 수 없다.
총선의 실패 이유를 되짚어보는 이유는 같은 실패를 다시 하지 않기 위해서이다. 그러나 우파는 9년 동안 동일한 총선 실패를 세 번째 반복해서 하고 있고, 종전의 실수를 고치려는 태도도 보이지 않고 있다. 도대체 이 사람들에게 위기의식이라는 것이 존재하는지 의문이 아닐 수 없다.
임무영 변호사: 서울대학교 법대 4학년 재학 중 사법시험에 합격해 2020년 서울고등검찰청 검사로 명예퇴직할 때까지 약 30년 동안 검사로 재직했다. 1994년에 《검탑》이라는 무협소설을 출간했으며, 2011년에는 부인과 공저로 《황제의 특사 이준》이라는 역사소설을 출간하여 화제가 되었다. 문재인 정권과 이재명에 신랄한 비판을 가하지만 윤석열 정권에 대해서도 비판적 관점을 견지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