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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팩트 체크] 문재인이 사랑하는 ‘홍범도 장군’의 실체

항일 독립운동 영웅으로 추앙받는 홍범도는 자유시참변에서 한국 무장 독립군을 몰살시키는 데 앞장 서
레닌으로부터 감사의 표시로 금화 100루블, 군복 한 벌, 홍범도 이름이 새겨진 권총을 선물로 받아

 

문재인 전 대통령은 28일 “육사 교정 항일무장독립운동 영웅들의 흉상 철거 움직임에 깊은 우려를 표한다”며 “대한민국의 뿌리가 임시정부에 있듯이 우리 국군의 뿌리도 대한독립군과 광복군에 있음을 부정하는 것인가”라고 했다. 문 전 대통령은 “국권을 잃고 만주로, 연해주로, 중앙아시아로 떠돌며 풍찬노숙했던 항일부장독립운동 영웅들의 흉상이 오늘 대한민국에서도 이리저리 떠돌아야겠느냐”며 “그것이 그분들에 대한 우리의 예우이며 보훈이냐”고 했다.

 

문 전 대통령의 ‘홍범도 장군’ 사랑은 유별나다. 문 전 대통령은 2021년 8월 14일 황기철 국가보훈처장을 특사로 하는 특사단을 카자흐스탄에 파견해 홍범도 장군의 유해를 모셔왔으며 대전현충원에 안장했다. 또한 문 전 대통령은 홍범도 장군 유해 봉환을 계기로 건국훈장에서 가장 높은 등급인 대한민국장에 추서했다. 홍범도 장군은 이미 1962년에 건군훈장 2등급인 대통령장을 받았지만, 문재인 전 대통령은 여운형 선생과 홍범도 장군에게 재임 기간 동안 건국훈장을 특별히 두 번 중복 수여했다.

 

홍범도는 연합뉴스에 따르면 “1920년 최진동 장군과 함께 독립군을 이끌고 봉오동 골짜기에서 일본 월강(越江) 추격대와 독립투쟁 최초의 전면전을 벌여 무장독립운동사에 길이 남을 승리를 거둔 인물”이다.

 

평양에서 머슴의 아들로 태어난 홍범도는 연해주 망명 시절 한인 대표기관인 권업회 부회장으로 활동했고, 러시아 볼셰비키당의 지원으로 조직된 이동휘의 한인사회당과 깊은 연계를 맺었다.

 

홍범도는 3.1 운동 직후 연해주에서 대한독립군을 조직해 국경을 넘어 함경남도 혜산진의 일본군 수비대를 습격했다. 이는 3.1운동 이후 독립군 최초의 국내 진입작전이다. 9월에는 함남 갑산군의 금정 주재소와 일본 관공서를 습격했다. 10월에는 평북 만포진에 진입해 일본군과 70여 명을 살상해 국내 침공 작전 중 최대의 전과를 기록했다.

 

홍범도는 1919년 8월 8일 연해주 일대에서 모집한 대한독립군 106명을 인솔해 간도로 인동했다. 홍범도는 최진동 부대와 연한해 군무독군부를 결성했다. 1920년 5월 28일 안무의 국민회군까지 참여해 대한북로독군부(大韓北路軍督軍部)가 출범했다. 의군부, 의민단, 신민단이 이에 합류했다. 대한북로독군부는 화룡현 봉오동에 근거지를 세웠다.

 

6월 7일 봉오동 골짜기에서 홍범도가 지휘하는 독립군이 일본군을 매복 공격해 큰 승리를 거뒀다. 상해 임정의 발표에 따르면 봉오동 전투에서 일본군은 전사 157명, 중상 200여 명, 경상 100여 명의 피해를 입었다. 반면 독립군은 전사 4명, 중상 2명에 불과했다.

 

그해 10월 21일부터 26일까지 홍범도와 김좌진이 이끄는 한국 독립군은 청산리 일대에서 일본군과 격전을 벌였다. 한국 독립군은 일본군 1,200여 명을 섬멸하는 청산리대첩을 세웠다. 독립군은 사상자가 150명에 불과했다.

 

일본군은 이후 독립군 근거지를 말살하기 위해 북간도의 훈춘, 왕청, 화룡, 연길 일대를 초토화했다. 한인 가옥을 불태우고 재산과 식량을 약탈했고, 한인들을 보는 대로 학살했다. 이것이 경신(庚申)참변이다.

 

이후 홍범도를 비롯해 한인 무장부대 4,500여 명은 자유시에 집결했다. 당시 시베리아 일대 한인 공산주의 세력은 대한국민회의를 지지하는 이르쿠츠크파와 이동휘를 지지하는 한인사회당파로 분열됐다. 이르쿠츠파 무장세력의 핵심은 자유대대였고, 상해파의 주력은 사할린부대였다.

 

홍범도는 처음에는 사할린부대 편에 섰으며, 이르쿠츠파 배후에 소비에트 정부가 있다는 사실이 밝혀지자 6월 2일 안무, 최진동, 지청천 등과 함께 이르쿠츠파의 자유대대 진영으로 돌아섰다.

 

소비에트 정부는 6월 28일 수라세프카에 주둥 중이던 사할린 부대를 포위했고, 홍범도, 최진동, 안무, 이청천 등은 사할린 부대를 공격했다.

 

그들은 기관총과 대포, 장갑차를 앞세워 적군 편입을 거부한 한국 독립군들은 무차별 학살했다. 자유시에서 가장 심각한 피해를 당한 부대는 청산리전투에 참가했던 의군부 대원들이었다. 항일 독립운동 영웅으로 추앙받는 홍범도는 자유시참변에서 한국 무장 독립군을 몰살시키는 데 앞장선 것이다.

 

이후 홍범도는 고려혁명군 여단 제1대대장에 임명됐다. 그의 공식 직함은 적군 내 한인 빨치산(의용군) 대장이었다.

 

홍범도는 1922년 1월 21일부터 2월 2일까지 모스크바에서 열린 제1회 극동 제민족대회(극동인민대표대회)에 한인 대표 56명 중 한명으로 선출돼 모스크바를 방문했다. 대회가 끝난 뒤 2월 초 홍범도는 한인 무장세력(고력혁명군) 대표 자격으로 레닌, 트로츠키와 면담했다. 레닌은 홍범도에게 혁명정권에 협조해준 감사의 표시로 금화 100루블, 군복 한 벌, 홍범도 이름이 새겨진 권총을 선물로 주었다.

 

1937년 9월 초 홍범도는 스탈린의 명에 의해 중앙아시아로 강제 추방됐다. 1943년 10월 25일 크즐오르다의 조선극장 수위로 일하다 그곳에서 사망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