⑭‘오역도 허위보도에 해당한다’며 무거운 판결
“김종훈 쌀개방 추가협상 미국에 약속했었다”
2011년 9월 15일 서울의 한 일간지(한겨레신문, 사진) 1면에 톱 기사로 실린 제목이다.
이 신문은 폭로 전문 사이트 위키리크스를 인용, 김종훈 당시 외교통상부 통상교섭본부장이 한미FTA(자유무역협정) 공식 서명 직후인 2007년 8월 미국 측 고위 인사들과 만나 쌀 관세화 유예 종료 이후 미국과 별도로 쌀시장 개방 확대를 협상할 수 있음을 약속했다고 보도했다.
이에 대해 김 본부장은 신문이 위키리크스 영어 원문을 오역했다면서 협상을 약속한 사실이 없다고 주장했다. 그리고 해당 신문사와 기자들을 상대로 정정보도 및 손해 배상 청구소송을 제기했다.
2007년 8월 29일 서울의 모처에서 김 본부장과 포머로이(Earl Pomeroy) 미 민주당 하원의원, 버시바우(Alexander Vershbow) 주한미국대사가 회동했다. 당시는 한미FTA 협상안이 타결된 지 불과 두 달 후인 데다 국회 비준을 앞두고 여야가 첨예하게 대립하고 있던 시점이었다.
이런 민감한 시점에 우리측 협상대표였던 김 본부장이 미국의 고위인사를 만났다는 것은 중대한 관심사라 할 수 있다. 그럼에도 대화 내용은 물론 세 사람의 회동 사실조차 일반에게 알려지지 않았다. 하지만 4년 뒤인 2011년 8월 30일 회동사실이 폭로된다. 위키리크스가 미 정부문서를 통해 회동 사실을 공개했고, 이를 우리 신문이 보도한 것이다. 위키리크스에 언급된 관련 부분은 다음과 같다.
(Turning to rice, Pomeroy said this issue had been left out of the FTA. This omission had disappointed major rice growers in California and worked against the perception that the KORUS-FTA was a balanced, comprehensive agreement. Kim replied that Korea's domestic political climate was highly protective of its small, rapidly aging farm population (only six percent of its total population, producing only three percent of GDP). Widely viewed as deserving 'affirmative action/ rice farmers had attracted enough public support to make the issue untouchable at this time. However, Kim(Jong-Hoon) indicated that the ROKG(Republic Of Korea Government) would revisit the rice issue once the 2004 WTO arrangement on rice quotas expired in 2014.〉
포머로이 의원이 “한-미 FTA에서 쌀이 제외돼 캘리포니아 곡물업자들이 반발하고 있다”며 쌀 개방을 촉구하자 김 본부장이 현재로는 쌀 문제를 다룰 수 없다고 답한 것으로 돼있다. “하지만 김본부장은 세계무역기구(WTO)의 쌀 관세화 유예가 2014년에 끝나면 한국정부가 재논의할 것임을 시사했다”고 말한 것으로 외교 전문에 적혀 있다.
여기서 논란이 된 단어는 ‘indicated’다. 신문은 이 단어를 ‘약속했다’로 번역해 썼다. 하지만 당사자인 김 본부장은 약속한 사실이 없으니 허위보도라고 주장했다. 논란에 대해 1심법원인 서울서부지법 민사합의12부(재판장 배호근)는 2012년 2월10일 “정정보도 하라”고 판결했다. 정정보도하라는 내용은 이렇다.
“위키리크스 문건에 따르면, 김종훈 본부장이 ‘쌀 문제는 2014년 세계무역기구 쌀 쿼터 협정이 종료되면 재논의될 수 있다’고 발언한 것으로 돼 있을 뿐, 쌀 개방 추가 협상을 약속하거나 쌀 개방을 밀약한 발언은 없는 것으로 확인돼 이를 알려드립니다.”
패소했던 신문은 즉각 항소했다. 그러나 이번에는 법원이 신문의 허위보도(오역)를 인정하면서도 정정보도 및 손해배상부분에서는 신문사측의 손을 들어주었다.
2심 재판부인 서울중앙지법 민사합의 14부(재판장 노만경)는 2012년 5월16일 판결문에서 “위키 리크스 문건의 내용은 … ‘언급하였다’고 되어 있을 뿐,… ‘약속하였다’는 기재가 없고, 위 문건의 전체 문맥에 비추어 보더라도 원고가 쌀 개방의 추가협상을 ‘약속하였다’고 해석될 수 있는 직접적인 표현은 없는 점 … 등에 비추어 보면, … 2014년 이후 쌀에 관하여 재논의할 수 있다는 일반적인 가능성을 언급한 것으로 기재되어 있을 뿐임에도,이 사건 보도에서 ‘약속했다’는 단정적 표현을 사용한 것은 위키 리크스 문건의 내용을 왜곡한 것이어서 허위 사실에 해당한다고 봄이 상당하다"고 판시했다.
재판부는 그러면서도 “원고(김종훈)의 사회적 평가가 다소 저하될 여지가 있지만 보도 내용이 악의적이거나 경솔한 공격으로 볼 수 없다"며 신문사 측에 승소판결을 내렸다.
법원은 허위 보도이지만 해당 사안이 '주요한 공적 관심사’라는 점,원고가 '공인’이라는 점도 고려해 위법성이 조각된다고 판결한 것으로 보인다. 이 사건은 이후 새누리당 국회의원에 당선된 원고가 대선을 20여일 앞둔 시점인 2012년 11월26일 소를 취하함으로써 일단 신문사의 ‘승리’로 확정되고 말았다.
하지만 이 사건은 1, 2심 모두 오역을 허위 보도로 인정했다는 점에서 언론의 오역 보도에 경종을 울린 것으로 평가할 수 있다.<서옥식의 가짜뉴스의 세계(해맞이미디어)에서 발췌, 필자=전 연합뉴스 편집국장, 대한언론인회 부회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