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편집자 주] 언론을 비롯한 문화계, 학계, 의료계 등 각계 필진의 자유로운 글쓰기 모임인 자유칼럼그룹(http://www.freecolumn.co.kr) 2일 자에 가짜뉴스에 관한 임종건 한국ABC협회 회장 글이 실렸다. 내용이 본 매체가 추구하는 가짜뉴스 척결과 맥이 닿아 있어 필자의 양해를 얻어 글을 소개한다. 다음은 칼럼 내용이다.
2020년 11월3일 미국대선에서 조 바이든 후보에게 패배한 트럼프 후보는 미국 28개 주에서 도입한 도미니언 투개표기의 조작으로 자신의 표를 도둑맞은 것이 패인이라고 주장했다. 그는 아직도 이 주장을 굽히지 않으면서 내년 선거 재출마를 꿈꾸고 있다.
트럼프의 ‘표도둑’ 주장은 선거결과에 대한 승복 거부에 이어 2021년 1월6일 트럼프 지지자들에 의한 미 국회의사당 난입이라는 미국 민주주의 역사에서 치욕적인 사건을 불러왔다. 트럼프 편에 서서 이 주장을 가장 열렬히 또 반복적으로 선전해온 방송이 케이블 뉴스전문 채널 폭스뉴스다.
미국의 투개표기 제조기업인 도미니언이 2021년 3월 폭스뉴스를 상대로 제기한 명예훼손 및 손해배상 청구소송에서 미 델라웨어주 대법원은 폭스뉴스에 7억 8,750만 달러(1조 400억원)를 지불토록 판결했다. 원래 청구액이 16억 달러였으나 패소가 명확해지자 폭스 측은 도미니언과의 조정을 신청했고, 법원이 이를 받아들였다.
이 금액은 폭스 뉴스의 1년 순익의 1.5배에 달하는 거액이지만, 조정을 통해 배상액은 절반으로 줄었고, 재판정에서 거짓방송의 실상이 만천하에 드러나는 망신은 면했으나, 시청자의 신뢰 저하는 물론 경영상으로도 큰 타격을 면키 어렵게 됐다.
미국은 수정헌법 1조에 언론자유를 명시한 나라다. 웬만한 오보라도 ‘현실적인 악의(Actual Malice)’가 없다면 언론자유의 영역으로 보호해온 나라다. 고위공직자나 유명인사가 언론을 상대로 명예훼손 소송을 제기하려면 명예훼손에 ‘현실적 악의’의 입증 책임을 원고가 지도록 해 사실상 소송제기를 어렵게 해왔다.
물론 이 사건의 원고가 공직자가 아니라 민간기업이라는 점을 감안하더라도 이번 판결은 매우 이례적이다. 금액의 크기에서뿐만이 아니라 언론 자유의 범위와 언론의 책임에 대해 미국 법원이 매우 엄격한 잣대를 댔다는 점에서 그렇다.
이 사건의 에릭 데이비스 판사는 폭스뉴스의 기자나 앵커는 물론 경영자들이 도미니언의 투개표 조작이 명백히 사실이 아님을 알고서도 반복적으로 보도한 증거가 ‘수정처럼(Crystally)' 명백하다고 밝혔다. 폭스뉴스는 그에 대한 책임을 인정, 그 같은 주장에 가장 앞장섰던 간판 앵커 터커 칼슨을 해고했다.
가짜뉴스에 엄중한 경고를 내린 이정표적인 이 판결은 미국만이 아니라 전 세계, 특히 한국에서 갖는 의미가 크다. 인터넷 강국이라는 허명 뒤에 신문 방송은 물론 SNS상에 가짜뉴스가 판을 치는 나라가 한국이기 때문이다. 더욱이 한국은 투개표 부정의혹 제기의 원조국이라고 할 만큼 선거 때마다 부정 투개표 의혹이 제기됐다.
제기된 의혹의 내용도 미국과 판박이다. 특정 세력의 조작에 의해 표를 없애거나 바꿔치기 했다는 수법이 같은 것은 물론 그런 조작이 해외 서버를 통해 이뤄진다는 점도 같다. 해외의 서버 조작국이 중국과 베네수엘라라는 것도 같다.
한 가지 다른 점은 미국에서는 트럼프 측이 제기한 부정선거 소송이 모두 기각됐지만 한국에선 아직 매듭이 지어지지 않았다는 것이다. 그에 따라 이번 미국의 소송 결과가 한국의 선거 소송에 어떤 영향을 미칠 것인지도 관심사다. 2020년 21대 총선에서 정점을 이룬 국내의 투개표 부정 의혹은 작년의 대선 및 지방선거에서 국민의힘이 승리한 후 잠잠한 상태다.
사실 제기된 의혹은 인터넷 시대의 기술만능주의가 만들어 낸 괴담 수준이다. 소수의 기술자들이 투개표기의 정점에서 전체 선거를 얼마든지 조작할 수 있다는 것이 핵심적인 레퍼토리다. 고도의 첨단기술과 관련된 의혹이라 일반인들은 내용을 이해하기조차 어렵다.
이에 대한 반론은 어떻게 한 두 사람에 의해 전국적인 투개표조작이 가능하냐는 것이다. 기술적으로 가능하더라도 다수의 사람들에 의한 공모관계가 없이는 실행되기 어렵고 그 과정이 감추어 질 수 없다는 주장이다. 상상 속의 의혹, 믿거나 말거나 식의 의혹이란 얘기다.
기술적인 지식이 없으면 의혹은 물론 해명조차 일반인들은 알아듣기 어렵고, 해명에 대해서는 기술적으로 더욱 이해하기 어려운 의혹들이 끝이 없이 뒤따른다. 그럼에도 미국의 대법원은 제소 내용에 근거가 없다고 분명하게 가려줬지만, 한국의 대법원은 사안의 난해성을 이유로 6개월 안에 끝내야 할 재판을 2년 넘게 끌고 있다.
선거 재판만이 아니라 일반 명예훼손 소송에서 심판자로서의 법원의 기능도 허약하기 짝이 없다. 고의적 또는 확증편향적 왜곡과 조작을 일삼는 개인이나 언론에 대해 법원은 언론자유 영역이라며 보호하고, 처벌해도 솜방망이다.
우리 사회가 거짓에 무감각한 사회가 되어가고 있는 이유다. 범죄를 저지르고도 잡아떼면 그만이라는 풍조가 만연해 있다. 2008년 mbc 광우병 사건에서 최근 청담동 술자리사건에 이르기까지 온갖 가짜뉴스들이 사회를 어지럽혔지만 범법자들은 거의 처벌되지 않았고, 사과나 반성도 없었다. 오히려 사기꾼들은 가짜뉴스로 돈을 버는 세상이 되었다.
민주당 이재명 대표의 사법리스크와 최근의 야당 전당대회 돈봉투 사건 등 국민의 법감정에 지대한 영향을 미치게 될 사건들도 그런 타성 속에서 묻혀가는 느낌이다. 법질서를 세우기 위해서는 물론 언론의 자유를 지키기 위해서도 가짜뉴스의 기준을 엄격히 하고, 단호히 응징할 때가 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