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건국 76주년 세미나②… "4.19로 물러난 이승만, 책임정치의 표본"

남광규 박사 "3.15부정선거 이승만과 무관… 신생국 지도자 중 스스로 하야한 사례 없어"
"이승만의 정읍 발언 전 이미 북한은 인민위원회가 정부 역할… 화폐 만들고 군대도 조직"
"이승만의 국민학교 의무교육 덕에 한국이 개인의 자유와 평등 보장하는 문명국으로 도약"

 

이승만 초대 대한민국 대통령의 건국 이념은 크게 공화주의, 자유반공주의, 자유통일, 한미동맹, 아시아태평양 중심 사상 등으로 요약된다. 이 같은 이승만의 건국 이념은 76년이 지난 현재에도 여전히 국가 생존을 위한 핵심가치로 평가된다. 그런데도 그의 행적은 그동안 반대파들로부터 끊임없이 왜곡돼 왔다. 대표적으로 남한만이라도 단독 정부를 수립해야 한다는 ‘정읍 발언’이 분단을 초래했다는 좌파의 왜곡 선전이다. 당시 북한 지역은 김일성을 중심으로 한 인민위원회가 전국 단위로 수립돼 사실상 정부 수립이 완료된 것이나 다름 없었다. 정읍 발언은 한반도 전체의 공산화를 막기 위해선 남한 만이라도 자유민주주의에 입각한 정부를 세워야 한다는 판단에 따른 것이었다. 그러나 많은 국민들은 이승만이 권력 욕심 때문에 통일 노력을 포기하고 단독 정부 수립을 ‘강행’한 것으로 기억하고 있다. 

 

건국 제76주년을 기념해 지난 12일 서울 프레스센터에서는 사단법인 이승만대통령기념사업회 주최로 이승만을 재평가하는 학술대회가 열렸다. 이 자리에서 남광규 고려대 통일과국제평화센터장은 ‘이승만 건국대통령에 대한 오해와 진실’을 주제로 발표했다. 남 센터장은 이승만이 자유와 민권을 ‘자각’한 사회개혁운동가이자 일제 하에선 미국을 무대로 자유민주주의 건국 노선을 추구했던 독립운동가라고 평가했다. 또 이승만은 진정 교육평등을 실현한 사람으로서, ‘국민학교 의무교육’을 최초로 실시한 점을 높이 샀다. 국민 교육이 없으면 각종 구습에서 벗어나 개인의 자유와 평등을 기반으로 한 문명국가 건설이 불가능하고 봤기 때문이다. 

 

이승만의 정읍 발언은 1946년 6월 3일에 나왔다. 그해 5월 서울에서 개최된 미소공동위원회는 결렬됐고 남한 내 공산주의자들은 폭력투쟁으로 노선을 전환했다. 소련과 좌익은 북한 지역에서 사실상 친소 공산정권을 이미 수립한 현실을 바탕으로 남한까지 공산화한다는 목표에 따라 움직였다. 

 

정읍 발언이 있기 넉달 전인 1946년 2월에 북한에는 북조선임시인민위원회가 조직됐고, 남북협상에 참가했던 김규식도 북한에서 화폐 발행, 토지개혁 실시, 그리고 군대 조직 등 사실상 정부가 수립됐다고 말했다. 이승만의 단정노선은 북한이 이미 공산화된 상태에서 남한만이라도 자유정부를 수립해야 한다는 당연한 판단이었다. 

 

 

이승만에 대한 중요한 왜곡 지점 중 하나는 친일파 청산 문제다. 좌파는 이승만이 친일파 청산을 유야무야 시켰다고 줄기차게 공격했고 그 때문에 한국의 지배계층은 친일 반민족 집단이란 인식을 낳았다. 그런데 독도를 한국 영토로 편입시킨 건 다름아닌 이승만이란 게 팩트다. 또 대한민국 초대 내각을 보면 국무총리 겸 국방장관 이범석은 광복군 참모장이었다. 외무장관 장태상은 일제 하 청구구락부사건으로 투옥된 바 있다. 내무장관 윤치영은 흥업구락부사건으로 역시 옥고를 치렀다. 무임소장관 이청천은 광복군 총사령관 출신이다.

 

반면 북한 내각을 보면, 김일성 친동생 부주석 김영주는 일제 하 헌병 보조원이었다. 인민위원회 사법부장 장헌근은 일제 하 중추원 참의를 지냈다. 남로당 2인자 이승엽은 내선일체를 주장했던 대화숙 멤버였다. 

 

이승만에 대한 폄하는 4.19혁명이 한국 자유민주주의 발전사에서 높은 위상을 차지하게 되면서 자연히 ‘독재자 이승만’이란 프레임이 만들어졌기 때문이기도 하다. 이에 대해 남광규 센터장은 “이승만 대통령은 1960년 선거에서 야당 후보가 사망하는 바람에 대통령에 자동으로 당선되는 게 순서였기 때문에 3.15 부정선거와 관련이 있을 수 없다”며 “그런데도 4.19로 많은 젊은이들이 희생당하자 국정 책임자로서 물러난 것”이라고 설명했다. 

 

남 센터장은 그러면서 “2차대전 후 태어난 신생 국가 중에서 이승만처럼 도의적 책임을 지고 스스로 대통령에서 물러난 사례는 없다”며 “이승만은 오히려 민주주의 책임정치를 몸소 실천한 위대한 지도자”라고 평가했다. 
 

송원근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