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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범도, 레닌이 준 권총으로 동료 한인 독립군 사살

자유시참변에 불만 품은 김창수와 김오남으로부터 불시에 공격당해 이가 두 대 부러지자 보복으로 사살

 

‘독립 영웅’ 홍범도 장군이 자유시 참변 재판과정에서 위원으로 참가한 사실로 사할린부대 출신 한인들로부터 불시에 공격을 당하자, 이에 대한 보복으로 레닌에게서 받은 권총으로 이들을 사살한 것으로 드러났다.

 

봉오동전투와 청산리전투의 승리에 대한 보복으로 일본군은 간도 일대의 한인 마을을 초토화하고 재산과 식량을 약탈했으며, 한인들을 학살하는 경신(庚申)참변을 저질렀다. 상황이 위급해지자 서일, 김좌진이 이끄는 북로군정서, 지청천의 서로군정서, 홍범도의 대한독립군 등 여러 조직으로 분산되어 있던 독립군은 일단 중국 독립군의 근거지 였던 헤이룽장성 밀산[密山]에 집결했다가 독립군을 통합 ·재편성하여 병력 3500 명의 대한독립군단으로 조직했다.

 

대한독립군단은 이동휘와 한국사회당의 선전에 속아 소련 혁명세력의 후원과 독립군 단일지도부 구성이라는 목표를 위해 북쪽으로 이동했다. 러시아 제야 강변에 위치한 자유시에 집결한 홍범도를 비롯해 한인 무장부대 4,500여 명은 대한국민회의를 지지하는 이르쿠츠크파와 이동휘를 지지하는 한인사회당파(상해파 고려공산당)로 분열됐다. 이르쿠츠파 무장세력의 핵심은 자유대대였고, 상해파의 주력은 사할린부대(니항부대)였다.

 

홍범도는 처음에는 사할린부대 편에 섰으며, 이르쿠츠파 배후에 소비에트 정부가 있다는 사실이 밝혀지자 6월 2일 안무, 최진동, 이청천 등과 함께 이르쿠츠파의 자유대대 진영으로 돌아섰다.

 

1921년 6월 28일 발생한 자유시 참변은 이르쿠츠파의 고려군정의회가 원동공화국 제2군단 제29연대의 지원을 받아 상해파의 한인군대인 사할린 의용대를 무장해제하는 과정에서 많은 한국 독립군들을 살상한, 동족상잔의 비극적 사건이었다.

 

홍범도, 최진동, 허재욱, 안무, 이청천 등은 자유시 참변 이후 각 무장부대가 고려혁명군으로 통합된 후인 1921년 10월 1일 고려혁명군정의회 입장을 옹호하고 사할린부대를 성토하는 내용의 성명서를 발표했다.

 

자유시 참변 후 고려혁명군정의회는 포로로 생포한 864명 중 500명을 재판에 회부했다. 이들은 대부분 니항부대 군인들이었다. 이들 가운데 범죄행위에 가담했다고 인정된 428명은 극독공화국 제2군단에 인계됐다. 이들은 ‘죄수부대’로 편성돼 우수문 벌목장에서 강제노동을 했다. 1922년 8월 1일자 ‘독립신문’ 기사에는 이들이 여전히 노역에 종사하고 있는 것으로 나와있다. 이 기사에 따르면 여기서 탈출한 이들 중 20여 명은 중국령으로 잘못 들어갔다가 중국군에게 적군이라고 총살당했으며, 다른 5명은 러시아 농촌에서 떡을 걸식하려다 절도 혐의로 피살당하기도 했다. 나머지 중대범죄자로 분류된 72명은 주로 장교들이었는데, 이들은 7월 30일 이르쿠츠크로 압송됐다. 코민테른 극동비서부와 고려혁명군정의회가 조직한 ‘임시고려군사혁명법원’에서 재판을 받기 위해서였다. 다반군대 중대장이었던 최 니콜라이를 비롯한 7명이 열차에서 탈출을 시도했다. 차량바닥을 뜯어내고 철로로 뛰어내리다 최 니콜라이와 한권길은 열차에 두 다리를 잘려 사망했고, 박 그리고리, 김 인노겐치는 다시 체포돼 이르쿠츠크로 압송됐다. 세 사람만 탈출에 성공했다.

 

이르쿠츠크로 압송된 이들에 대한 재판은 11월까지 계속되었다. 재판위원장은 채동순, 위원은 홍범도와 박승만이었다. 1921년 11월 27일부터 30일까지 자유시 참변 피고인으로 재판에 회부돼 판결을 받은 사람은 50명이었다. 이들 중 3명에게 징역 2년, 5명에게 징역 1년, 24명에게 1년간 집행유예, 17명은 방면해 군대에 종사하게 한다는 판결이 내려졌다.

 

홍범도가 군사재판 위원을 맡은 이유는 한인 빨치산들 사이에서 그가 지닌 명망과 권위 때문인 것으로 보인다. 고려혁명군 측은 항일의병장으로서 명성이 높은 홍범도를 위원으로 선임해 재판이 공정하다는 것을 보여주고자 했을 것이다. 홍범도 스스로도 재판에서 병사들이 피해를 보지 않고 공정한 판결이 나올 수 있도록 하기 위해 재판에 참가했다고 말한 것으로 알려졌다(이인섭 <홍범도 장군>). 그러나 재판은 고려혁명군 입장에서 자신들의 명령에 복종하지 않았던 사람들에 대한 판결을 내리는 과정이었고 홍범도는 이 재판에 위원으로 참가했다는 사실 때문에 이후 주위로부터 많은 원성을 들었다. 홍범도와 긴밀한 관계를 맺었던 상해파 인사들은 특히 홍범도를 배신자로 여겼을 수 있다.

 

홍범도는 1922년 1월 21일부터 2월 1일 모스크바와 페트로그라드에서 개최된 원동민족혁명단체대표회(극동노력자대회)에 참가했다. 레닌을 직접 면담한 홍범도는 ‘레닌으로부터 홍범도에게’라는 이름이 새겨진 권총(마우제르 권총), 100루블의 상금, 그리고 적군 모자를 선물로 받았다.

 

홍범도는 1923년 8월 블라고베셴스크를 거쳐 하바롭스크에 간다. 그해 4월 14일(음력) 홍범도는 사할린부대 출신 김창수와 김오남으로부터 자유시 참변 당시 칼란다리쉬빌리 군대에 맞서 싸우지 않았다는 이유로 불시에 공격을 당해 이가 두 대 부러지는 부상을 입었다. 이에 홍범도는 레닌에게서 받은 권총으로 이들을 사살하고 감옥에 갇혔으나 레닌과 칼리닌 등의 증명서를 얻어 석방됐다(반명률 <홍범도의 일지>).

 

이후 홍범도는 이만의 사인발로 가서 3년 동안 농사를 짓고 양봉알쩨리(협동조합)를 조직해 2년 동안 운영하는 등 1937년까지 연해주 집단농장에서 일했다. 홍범도가 소련공산당에 입당한 것은 1927년으로, 그가 와구통 이만농촌에서 농사를 짓고 있을 때였다.

 

양연희 기자 takahee@hanmaill.ne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