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80년 폴란드에서 한 경제학자가 슈퍼마켓을 처음 방문했다는 일화가 있다. 그는 진열대 앞에서 한참을 서 있다가 이렇게 중얼거렸다고 한다. 이것을 계획한 사람이 누구인가? 그 슈퍼마켓의 상품 배치는 누구도 계획하지 않았다. 수천 명의 생산자, 유통업자, 소비자가 각자의 필요와 이익을 좇아 움직인 결과물이었다.
이 일화는 프리드리히 하이에크(Friedrich August von Hayek)가 평생 강조한 한 가지 진실을 압축하고 있다. 복잡한 사회 질서는 누군가의 설계에서 나오는 것이 아니라, 무수히 많은 개인들의 자발적 상호작용에서 자연스럽게 생겨난다. 그는 이것을 자생적 질서(spontaneous order)라고 불렀다.
지식은 분산되어 있다
하이에크의 출발점은 지식에 관한 통찰이었다. 그는 사회에 필요한 지식이 어느 한 사람이나 기관에 집중될 수 없다고 보았다. 어느 지역에서 무엇이 부족한지, 어떤 방식이 더 효율적인지, 소비자가 무엇을 원하는지 — 이 모든 정보는 현장의 수많은 개인들 속에 분산되어 있다.
문제는 이 분산된 지식을 중앙에서 수집하고 처리하는 것이 원천적으로 불가능하다는 점이다. 아무리 뛰어난 관료도, 아무리 정교한 알고리즘도 수억 명의 실시간 선호와 상황을 동시에 파악할 수 없다. 그러나 가격은 할 수 있다. 시장 가격은 분산된 지식을 압축해서 모든 참여자에게 동시에 전달하는 유일한 신호 체계다.
규제가 가격을 왜곡하는 순간, 이 신호는 오염된다. 임대료 상한제를 도입하면 건물주는 임대 공급을 줄이고, 세입자는 더 오래 버티며, 결국 주택 부족이 심화된다. 최저가격제를 도입하면 재고가 쌓이고 시장이 마비된다. 규제는 선의로 시작하지만, 지식의 문제를 해결하지 못한 채 신호만 뒤틀어버린다.
규제는 왜 계속 실패하는가?
하이에크는 규제가 실패하는 이유를 치명적 자만(fatal conceit)이라는 개념으로 설명했다. 인간의 이성이 복잡한 사회 현상을 완전히 파악하고 설계할 수 있다는 오만함이 규제의 뿌리라는 것이다. 이 자만이 클수록 규제는 더 촘촘해지고, 시장은 더 심하게 왜곡된다.
한국의 사례는 이를 잘 보여준다. 2020년 시행된 임대차 3법은 전월세 급등을 막겠다는 선의로 도입됐다. 그러나 결과는 반대였다. 계약갱신청구권이 시행되자 집주인들은 신규 계약 시점에 미리 4년치 인상분을 반영했고, 전세 매물은 줄었으며, 가격은 오히려 폭등했다. 규제가 해결하려던 바로 그 문제를 악화시킨 것이다.
같은 패턴은 반복된다. 약값 규제는 신약 개발 유인을 줄이고, 카드 수수료 규제는 부가서비스 축소로 이어지며, 플랫폼 규제는 혁신 투자를 위축시킨다. 규제는 보이는 문제를 일시적으로 억누르지만, 보이지 않는 곳에서 더 큰 문제를 만들어낸다. 하이에크는 이것을 의도하지 않은 결과(unintended consequences)라고 불렀다.
경영자가 하이에크를 읽어야 하는 이유
하이에크의 통찰은 정치경제학에 머물지 않는다. 기업 경영에도 그대로 적용된다. 조직 안에서도 동일한 문제가 생긴다. 현장의 정보는 현장에 있다. 영업사원은 고객의 실제 반응을 알고, 공장 직원은 생산 현장의 비효율을 안다. 그러나 중앙집권적 경영 구조에서 이 지식은 위로 올라가는 과정에서 걸러지고 왜곡된다.
탁월한 경영자는 모든 것을 직접 결정하는 사람이 아니다. 현장의 분산된 지식이 자연스럽게 흐를 수 있는 구조를 만드는 사람이다. 권한 위임, 투명한 내부 가격 체계, 성과에 연동된 보상 — 이 모든 것이 하이에크적 해법이다.
규제를 설계하는 관료든, 조직을 이끄는 경영자든 공통된 유혹이 있다. 내가 더 잘 안다는 생각이다. 하이에크는 그 생각이 치명적이라고 경고한다. 겸손이 전략이다.
규제는 문제를 없애지 않는다. 문제를 보이지 않는 곳으로 옮길 뿐이다. 시장이 만들어내는 질서는 설계된 것이 아니라 발견된 것이다. 하이에크가 우리에게 남긴 가장 중요한 교훈은 이것이다. 복잡한 세상 앞에서 인간의 이성은 겸손해야 한다.
김병헌 자유시장연구원 부원장












